빛의 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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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친구 수요칼럼

설날 이틀 전 남해 섬마을에서 오랜 친구를 만났습니다. 경기도 평택에서 온 친구와 부산에서 같이 간 친구는 모두 35년 정도 묵은 친구로 이야기꺼리를 한 짐씩 싸들고 모였습니다. 언제나 전화로 다음에 한번 만나 밤을 보내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자던 약속이 미뤄져 오기만 하다가 이번에 그냥 저질러 버리기로 한 것입니다. 모두 결혼도 하기 전에 만나 등산도 같이 하고 술도 같이 마시던 친구들이 이제 모두 세월이 흐르고 흘러 얼굴에 주름도 늘고 머리숱이 빠지기도 하고 하얗게 변하기도 하여 나이를 속일 수도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직접 얼굴을 대하기는 거의 10년에 한 번, 전화로 안부를 묻기는 5년씩 정도의 시간이 지났지만 젊은 시절의 이야기는 끝없이 흘러 나왔습니다.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식당주인이 문을 닫을 즈음하여도 미처 끝내지 못하여 다시 숙소에 와서 계속되었고 그 동안 살아온 이야기나 지나온 이야기들이 실타래처럼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랫동안 알아왔던 친구도 워낙 입이 무겁고 말 수가 적어 아직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왔다는 것도 겨우 10년 전에 알았고, 거의 자기 이야기는 하지 않아 어떻게 살았는지도 잘 몰랐는데 이제 나이를 많이 먹고 나니 말수가 좀 많아져 그 동안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전 통도사 입구의 민박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달이 너무 밝아 마당으로 나와 달 한번 보고 술 한 잔 먹고 또 달 한 번 보고 술 한 잔 먹고를 계속하다가 모두 엉망진창으로 고주망태가 되었던 이야기, 등산가서 하산 때 고집부리다 결국 다른 길로 내려와 다시 만나서는 싱겁게 웃던 이야기, 산에서 길 잃어 고생한 이야기, 제가 결혼하기 전에 데리고 간 저의 아내에 대한 재미있는 오해, 당시 하숙집에 모여 술 마시던 사람들 이야기 등 등 밤이 깊도록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지만 마치 차례를 기다리듯 한사람이 이야기 하면 다른 사람이 맞장구를 치고 또 이야기를 끝내면 또 다른 이야기를 하고 .....그러면서 이제 이렇게 만나기가 쉽지 않으니 생각나면 그냥 이유 없이 전화하고 그렇게 만나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습니다.

친구들은 기억의 방식도 다르고 기억의 중요도도 달라 같은 사건도 각각 다른 회로와 경로로 기억하고 있었고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날 처음 이야기 하는 것도 있었고 처음 알게 된 일도 있었습니다. 오래된 친구의 만남은 묵은 김치처럼 신맛이 나도 깊은 맛이 있었고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가득 담겨 온화했고 누렇게 색깔 바랜 화선지의 담백한 문인화처럼 굵은 선이 느껴졌습니다.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사람이 그리워지고 누구에게 말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노인들을 가장 잘 살펴주는 방법은 그 분들의 인생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60살이 훌쩍 넘은 남자들의 수다가 그들 자신에게서는 보석처럼 반짝이는 젊은 날의 소중한 추억입니다. 그냥 마음 깊은 곳에 보관만 하기에는 너무도 아름답고 소중한 재산입니다. 누구나 한 권 정도의 소설 같은 인생기록이 있을 것입니다.

그날은 세 사람에게 허용된 190년의 기록을 점검하는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두 그 행복을 충분히 확인하고 다시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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